김주열 열사, 민주주의의 불꽃을 피우다

마산(現 창원)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5HVC+HFC 경상남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34-56 / 바다쪽 말뚝 근처에 인양지점 표석 있음



장소 이야기

김주열 열사는 호남(남원)의 아들로 태어나 영남(마산)에서 생을 마친 민주 열사이자 동서 화합의 상징적 존재이다. 이곳은 만 17세의 김주열(1943~1960)이 1960년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에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장소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악랄한 장기 독재 시도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마산에서 일어났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물을 뿌리던 소방차는 달려오다 전신주를 들이박았고, 폭음과 함께 마산 시내는 순식간에 암흑으로 바뀌었다. 정전과 동시에 강력한 최루탄이 발사되고 요란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찰의 총구가 정전을 틈타 시위대를 향해 불을 뿜은 것이다. 앞에 섰던 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쓰러졌고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는 분노의 열기가 서서히 끓고 있었다.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은 것도 무학초등학교 인근 자산동 길 복판에서였다.
김주열 열사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낯선 마산 거리를 헤매며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였다.
“내 아들 못 봤습니까?” “우리 아들 주열이 좀 찾아주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애끓는 가슴통을 부여잡고 호소를 했던 터라 마산 시민들도 ‘김주열 찾기’에 어느덧 혈안이 되어 있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시 중앙부두 앞에서 오른쪽 눈을 뚫고 왼쪽 목으로 관통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행방불명된 지 27일 만이었다.

“김주열이다!!!” 참혹한 몰골이었다.

3·15일 부정선거 시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김주열 열사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사망했고, 경찰은 이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시신에 돌을 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했던 것이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인양되면서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민중봉기로 폭발했고 이날 4·11마산민주항쟁의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곳을 ‘4월혁명 발원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 장소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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