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마산 시위, 살인 경찰 규탄

마산(現 창원) 4·19 마산경찰서 자리


 5HR7+RPG 경상남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3·15대로 147 / 마산합포우체국 앞에 있음



장소 이야기

1960년 3월 15일 제1차 마산 시위에서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뒤통수까지 관통한 채 실종된 지 27일 만에 발견되었다. 김주열 열사의 눈에 박힌 최루탄은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있어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무장폭도 진압용 무기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이 지급한 것이었다.

참혹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바다에 던져진 김주열 열사의 싸늘한 주검을 마산도립병원에서 확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민중봉기로 폭발하였다.

분노한 마산 시민 2만여 명은 마산경찰서와 시청으로 모여들었고, 플래카드와 구호를 통해 고문과 살인을 자행한 경찰을 규탄했다. 시위대는 이날 처음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정권 퇴진 구호와 정·부통령 재선거를 요구했다.

마산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와 경찰의 공방은 밤이 되자 더 격렬해졌다. 시위는 12일에도 이어졌다.

“탕탕탕!!”

밤 9시경부터 경찰은 발포하기 시작했고 시위대가 해산될 때까지 총성은 계속되었다. 4월 13일, 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성지여고생, 마산여고생, 제일여고생 1,000여 명이 시위에 나서게 된다. 대구 2·28민주운동부터 그 정점인 4월혁명까지 2개월가량 시위를 면면히 이끌어 온 것은 중·고등학생이었으며 특히 그 중심에 여중고생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제2차 마산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시민은 1,000명이 넘었으며, 항쟁의 성격을 띤 마산 시위는 4·19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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