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자 지역 민주화운동의 효시

대전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


 8CJH+2W 대전광역시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 186(중동) / 목척교 지난 사거리 지하보도입구 뒷편에 표석 있음



장소 이야기

1960년 2월 28일 대구 민주운동은 대전 고등학생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다. 3월 7일 대전의 6개 고등학교 대표들은 3월 8일 야당 부통령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와 때를 맞추어 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연합시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간부와 대표 학생들이 경찰에 잡혀가거나 교사들의 저지로 불발되었고 대전고등학교만이 시위를 강행하기로 한다.

3월 8일 오전 대전고등학교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불러 감금하고 시위철회를 설득했다. 그러나 5교시가 되자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교생 1,000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갔다. 경찰은 소방호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고 곤봉과 소총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수십 명이 연행되고 다쳤지만 흩어졌던 학생들은 다시 집결해 시위를 이어 나갔다.

3월 10일 대전상업고등학교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간부들이 연행되었다.

“야 큰일 났다. 애들 다 잡혀갔다. 우리는 우리대로 오늘 조회 끝나고 바로 하자!”

경찰의 눈을 피해 남은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학생 600여 명이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진압 경찰들이 동원되어 시위대열에서 부상자는 속출했으며 수십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대전의 3·8민주의거는 대구 2·28민주운동, 마산 3·15의거와 함께 4·19혁명의 실마리로서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대전의 4·19혁명 진원지 표지석은 대전 동구 중동 목척교 옆에 설치되어 있으며 독재에 맞서 선봉에 섰던 학생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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