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의 정신을 계승하다

광주 4·19 사적지 기념탑


 5W5C+F7Q 광주광역시

광주광역시 동구 중앙로 302 광주고등학교 / 교문 정문 입구 옆에 위치



장소 이야기

1960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에는 광주와 전주, 부산과 마산, 서울을 중심으로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4월 19일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울에서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적 총격을 가하고 있을 때 광주에서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4월19일 광주 시위는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1교시 종소리를 신호로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약속하고 목이 터지라 외칠 구호를 만들었다. 시위 낌새를 눈치챈 교장이 간부들을 불러 훈계를 한 뒤 교장실에 감금했다. 1교시에 울리기로 했던 종소리가 울리지 못하고 지나가자 2교시 시작과 동시에 신발을 벗어 타종하였다. 약속대로 전교생이 운동장에 집합하였지만, 정문은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교문을 막고 저지하는 선생님들과 경찰들을 저지를 뚫고 거리로 진출해 계림동 앞길로 나온 학생들은 경찰들에 의해 곤봉으로 후려 맞는다. 곤봉 세례를 맞으면서 광주 시내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동참을 호소하였고 어느새 금남로는 수천 명의 고등학생과 시민으로 불어났다.

광주고등학교에서 시작한 시위는 인근 광주상고, 광주농고, 광주공고, 광주수피아여고, 광주숭일고, 광주여고, 조대부고, 광주사범학교, 광주일고, 전남여고 등으로 이어져 광주의 고등학생들은 거의 다 거리로 뛰쳐나왔다.
지금의 금남로 공원 일대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전을 가졌으며 광주에서만 8명이 총에 맞아 숨졌으며,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7,800여 명의 부상당한 민주혁명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 회복하기 위해 금남로에 흘린 피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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