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서울 마로니에 공원
H2J3+259 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길 3(동숭동) / 구(舊) 서울대학교 본관 표지가 있음
장소 이야기
1960년 4월 19일 국민의 울분은 절정에 달했고, 시민들과 학생들이 불의와 불법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들의 고귀한 피가 강산을 물들게 하였다. 경무대 앞의 무차별 사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의과대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부상자들을 구출하였다. 병원 앞은 수혈할 피가 모자랐고 간호사들이 총동원되어 부상자 구호작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4월 19일 오후 5개의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경찰의 발포는 계속되었다. 서울에서만 치열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들썩이는 전국 규모의 시위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망각한 채 여전히 오만과 독선에 빠져있었다.
4월 19일의 죄 없는 학생들의 ‘피의 희생’을 지켜본 교수들은 4월 20일부터 은밀하게 행동 방향을 협의하고 있었다. 4월 25일 전국 교수단의 시국선언과 함께 잠시 소강상태였던 시위를 다시 불타게 하였다. 교수단 시위는 4·19혁명의 마지막을 알리는 자극제가 되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교수들의 시위 뒤에는 각 대학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었던 대학생들도 스승들의 행렬을 뒤따랐다. 학생과 시민들은 7~8천 명을 넘어섰고, 종로 앞에 이르렀을 땐 1만 명이 넘었다.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교수단 시위는 4·19에 이른 제2의 횃불이었다. 교수단의 시위가 시작 곳이 서울의 마로니에 공원이다. 4·19혁명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마로니에 공원은 원래 서울대 문리대 자리였다. 1960년 4월 25일 서울대 교수회관에 258명의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한 후 시위를 시작했다.
독재정권의 종말은 이렇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