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4·19혁명의 기억
울산 정임석 추모비
G8V8+3H 울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남구 중앙로204번길 49 울산공업고등학교 / 정문에서 50미터 앞 오른쪽에 있음
장소 이야기
4월 19일 광화문은 경찰의 무차별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과 학생들로 계속 늘어갔다. 시위대는 경무대 앞으로 압박해 나갔다. 위기감을 느낀 경찰은 오후 1시 30분경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무차별 발포하기 시작했다. 광화문의 거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 가운데 울산농림고등학교 출신으로 한양대에 다니고 있던 정임석 열사가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정임석 열사의 죽음은 울산 거리행진의 불씨가 되었다.
4월 26일 오전 8시 울산농림고등학교 학생 200여 명은 울산 군청과 경찰서를 향해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3000여 명으로 확산하였다.
‘이승만 물러가라’
‘고문 경찰 체포하라’
구호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이어갔다.
정임석 열사의 유해가 도착하자 울산의 거리는 더욱더 격렬해졌다. 울산의 4·19혁명은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발표 이후 7월 말까지 국회해산 등을 요구하며 민주주의 행동을 이어갔다.
울산의 4·19혁명은 다른 지역에 비해 늦었지만 시간의 빠르고 늦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울산의 4·19혁명이 울산 지역사회 변화에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