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죽었다?

마산(現 창원) 3·15의거 남성동파출소 자리


 VH8V+QCX 대구광역시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로 114 / 지금은 남성119안전센터(남성지구대)



장소 이야기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3·15의거는 경상남도 마산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노골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투표함이 엎어지면서 부정선거의 실체가 시민들에게 드러났다. 성난 시민들은 마산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의 진압에 돌을 던지며 저항하며 구호를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부정선거 즉시 중지하라!”

남성동 파출소는 마산시청, 북마산파출소와 함께 시민들이 가장 격렬하게 항거했던 곳이다. 수천 시민들이 창동사거리를 가득 메웠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대기 중이던 소방차가 호스로 물을 뿜으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지만 어린 여학생들과 부녀자는 물론 하층 노동자, 구두닦이까지 항쟁의 대열에 참가한 시위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오후 7시경, 시위대는 남성동 파출소를 포위하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밤의 시위대는 훨씬 적극적이었다. 경찰은 밤 8시 30분 병력을 증원하여 시민들에게 무차별 실탄 사격을 했다. 그리고 도망가는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체포했다. 수많은 시민이 파출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이때 경찰이 쓴 총탄으로 구두닦이 청년 오성원(20세)과 마산공고 학생 강융기(20세)가 사망했다. 양복점의 직공이었던 김동섭(28)은 총상 후유증으로 3년 뒤 사망했다.

경찰의 발포와 체포에 분노한 시민들은 파출소와 경찰서장 자택을 습격하고 북마산파출소는 시위대가 덮치는 과정에서 난로가 엎어져 건물이 전소되기도 하였다. 남성동 파출소도 시위대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는 마산을 필두로 불씨는 점점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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