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민주혁명에 불을 댕기다

서울 고대생 4‧18 피습현장터


 HX9X+Q4X 서울특별시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77



장소 이야기

시민들이 한가로이 걷기도 하고 많은 관광객들로 찾아 오는 서울 청계천 주변. 그 청계천의 물길을 따라 서울 종로4가 지역으로 가다보면 길가 어떤 바닥에 의미심장한 표지석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이 쓰여져 있다.

"그날 그들이 흘린 피가 1960년 4월 19일 민주혁명에 불을 댕기다”

그곳은 바로 1960년 4월 18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돌아 가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에 의해 불의의 습격을 당한 곳이다.

3월 15일 부정선거를 계기로 마산에서 2차례의 대규모 유혈 시위가 일어났고, 반독재 투쟁은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4월 신학기가 시작되자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생들은 4월 21일 연합 시위를 계획했다. 4월 11일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큰 충격을 받은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더는 지체할 수 없다며 먼저 방아쇠를 당겨주었다.

4월 18일 월요일 아침 간부들은 학교 안으로 숨어 들어가 학교의 제지를 무릅쓰고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했고 순식간에 3,000명이 모였다. 머리에 ‘고대’라고 새겨진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산발적인 저지망을 뚫으며 국회의사당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경찰의 저지에 학생들은 흩어졌다가도 다시 집결하여 연행 학생 석방과 부정선거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오후 5시쯤에는 수천 명의 중고생과 시민들이 합류해 시위대가 3만 명으로 불어났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학생들이 농성을 풀고 질서정연하게 평화 행진을 하며 귀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7시 20분경 100여 명의 괴한들이 뛰쳐나와 쇠망치, 쇠몽둥이, 쇠갈고리, 벽돌 등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무차별하게 폭행했다. 학생들이 맞서려 하자 괴한들은 사라졌고 순식간에 수십 학생들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부상당한 채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이 사건은 후에 ‘4.18 고려대 학생 피습 사건’으로 기록된다. 시위 목적이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되었고 시위 주역에 서울지역의 대학생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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